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드 2세 (문단 편집) === 폭로 === 이러한 극악무도한 행위가 계속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것이었고 몇 번의 폭로가 있기도 했다. 한 번은 조지 윌리엄스[* [[레전드 오브 타잔]]에서도 등장하는데 [[사무엘 잭슨]]이 연기했다.]라는 군인 출신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레오폴드 2세를 만났다. 그는 레오폴드 2세에게 "콩고에 돈을 많이 투자했으니, 당신은 그 대가로 흑인들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레오폴드 2세는 "나는 불쌍한 흑인들을 위한 백인으로서 의무감 때문에 그랬다. 투자한 돈을 회수할 생각도 없다" 라고 대답할 정도로 자신의 악행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윌리엄스는 감동 먹고 먼저 같은 흑인 기술자 40명을 콩고에 파견해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다가 기술자들을 보내기 전에 먼저 가보자는 생각에 콩고에 가 봤더니 [[지옥]]이 따로 없었다. 윌리엄스는 레오폴드 2세와 [[미국 대통령]]에게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에 대해서 항의 서한을 보냈지만 레오폴드 2세는 윌리엄스가 자신이 [[미군]]의 대령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꼬투리 잡아서 "저놈은 사기꾼이에요"라고 주장했다. 그러던 와중에 윌리엄스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 학대 행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일단 덮였다. 그러나 콩고에 머물고 있던 [[선교사]]들[* [[유럽]]의 [[선교사]]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퍼뜨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까지 걸고 식민지 나라들에 가서 선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과거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은 나라들 중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을 제외하면 [[기독교]]를 믿는 나라들이 많은 것. 물론 열강의 지배자들은 그런 그들의 마음조차 이용했다. 바꿔 말하면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와 붙어먹는 하수인들도 많았지만 반대로 자기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도 많았다. 선교사쯤 되는 학력이면 유럽 본토에서도 그럭저럭 지식인으로 잘 살 수 있는데 굳이 험한 만리타향까지 가는 사람들이었으니까.]은 원주민들을 대하는 잔인한 벨기에의 만행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독립국 군인들이 원주민들의 집과 소유물들을 약탈한 증거들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마침 아주 큰 범위를 찍을 수 있는 평판 [[카메라]]가 발명[* 초기의 [[사진기]]들은 [[유리]]를 [[필름]]으로 썼다. 때문에 유리에 남아있는 사진을 크게 인화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초기의 사진들은 주로 [[인물]] 초상에 국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891년]]에 유리를 아주 크게 키워서 광범위한 범위를 촬영 가능한 광학 카메라가 개발되면서 콩고에서의 잔악 행위가 마을 단위로 촬영되기 시작했다.]되었기 때문에 평판 카메라를 통해 찍힌 콩고의 각종 [[사진]]들이 [[미국]]과 [[유럽]]의 뉴스를 조금씩 타기 시작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점점 명확하게 사실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특히 그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명성 있는 [[더 타임즈]]가 큰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기도 했다. 헨리 몰튼 스탠리는 레오폴드 2세에게 "영국에서 떠돌고 있는 그 끔찍한 이야기들로 인해 당신은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에게 경고했다. "우리 [[영국인]]들은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오." 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레오폴드는 "만약 콩고에서 그런 학대가 일어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뿌리 뽑아야 합니다."라며 자기는 몰랐지만 책임자로서 반성하겠다는 가증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헨리 스탠리는 콩고 독립국 서기관 에트몬트 판에이트벨더(Edmond van Eetvelde) 남작에게 "만약 앞으로도 학대가 지속된다면 콩고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썼다. 그러던 중 콩고를 오가는 화물을 독점하는 엘더 데스터라는 회사의 직원인 [[https://en.wikipedia.org/wiki/E._D._Morel|모렐(E. D. Morel)]]이라는 사람이 화물을 운반하다가 회사의 무역 기록과 콩고 독립국의 무역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누군가가 콩고에서의 이익을 가로채고 있으며 원주민들은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로 이익을 빼돌리는 사람이 레오폴드 2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레오폴드 2세를 압박했다. 심지어 레오폴드 2세가 몇몇 문서들을 없애 버리라는 지시를 내린 공문서도 보여주고, 구체적으로 살해 당한 원주민들의 명단까지 발표했다. 그는 이전까지의 다른 폭로자들과는 차원이 달랐으며, 결국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 [[기자]]가 되었다. 사실 모렐 또한 [[인종차별]]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고 흑인을 열등한 자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사건 때문에 [[제국주의]]를 혐오하게 되어 [[사회주의]]와 반전 운동의 길을 걸었고 훗날 '''영국의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평생 콩고 사건을 해명하며 사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과정에서 [[아서 코난 도일]], [[버트런드 러셀]], [[조지 오웰]]과 친해졌다.] 이렇게 계속 일이 커지게 되자 [[영국인]] 여성 [[선교사]] 앨리스 셀리 해리슨(Alice Seely Harrison)이 사진을 찍어 '콩고 개혁 협회'에 사진을 제공했고 기사를 내면서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들이 세상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해리슨 여사는 콩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렐을 위해서 자기 월급보다도 더 많은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었고 모렐은 이를 바탕으로 콩고개혁협회를 설립했다. 이에 [[마크 트웨인]]과 [[아서 코난 도일]] 등의 유명인사들과 영국의 귀족 및 국회의원 등이 합류하며 콩고에서 벌어진 잔혹상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 70년 전 인류애적인 동기에서 노예 무역을 폐지한 유럽의 양심이 오늘날 콩고 독립국을 묵인하고 있음은 누가 뭐라 해도 놀라운 일입니다. 도덕의 질서라고 하는 시계추가 몇 시간쯤 늦어진 형국이라고나 할까요. > ---- >[[조지프 콘래드]]가 1903년 12월에 [[로저 캐즈먼트]]에게 보낸 편지 中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콩고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서 "우리는 이 사진을 보고 벨기에가 콩고에서 저지른 만행을 멈추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고 영국의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1909년에 발표한 《콩고의 범죄(Crime of Congo)》에서 "레오폴드가 식민지인 [[콩고]]에서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가인 그 [[아서 코난 도일]]이다. [[아서 코난 도일|코난 도일]]은 영국의 [[보어 전쟁]]을 지지하는 등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성향이 있기는 했으나(뭐 보어 전쟁에서 영국의 적이었던 보어인들도 대부분 흑인들을 괴롭히던 백인 지주/농장주들이었고 보어인에게 탄압받던 [[흑인]]들이 영국에 협조하기도 했다. 물론 보어인들을 때려잡은 뒤에는...) 극렬한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었다. 아일랜드 독립에는 찬성했고 인종차별적 시각에 의해 범죄자로 몰린 인도계 남성의 결백을 밝혀 구명해 주는 등 일부 사안에서는 상당히 열린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도 '노란 얼굴'이란 한 단편작을 통해 다인종 가족에 대해 포용적인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19~20세기 백인 엘리트 남성이라는 계급적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깨인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 한계 안에서는 양심적이고 선량한 축에 드는 사람이었다.] [[폴란드]]계 영국인 작가 [[조지프 콘래드]] 또한 자신이 레오폴드의 회사 소속 선장으로 콩고 강에서 배를 몰았던 경험을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이라는 이름의 소설로 출판하여 비판에 가담했다. 훗날 애덤 호크실드(Adam Hochschild)의 1998년 작품 <레오폴드 왕의 유령(King Leopold's Ghost)>에서는 "레오폴드가 개인 식민지 콩고 독립국에 가한 가혹한 노예 노역을 통한 무자비한 수탈과 살육으로, 1880~1920년 사이에 인구의 약 절반인 천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서술했으며 이러한 잔학한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인권 운동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영국]]의 소식은 [[독일]]에까지 퍼지게 되었고, [[쾰른]] 지역 신문 쾰니셰 자이퉁(Die kölnische Zeitung)을 통해 보고되었는데, 이 보고서에서 독립국 보호령인 [[술탄]] 제미오의 사령관 아킬레 파이베즈(Achille Fievez)는 1,308번의 수족 절단으로 기소되었다. 당시 콩고 독립국에서 터진 원주민 학대 행위가 문제가 된다는 것을 깨닫자 원주민 보호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이 위원회의 임무는 눈에 띄는 모든 잔악 행위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 또한 레오폴드 2세의 연막 작전에 불과했다. 레오폴드는 이미 위원회가 성공적으로 맡은 일을 실행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위원회 소속이었던 [[선교사]]들은 서로 수백 km만큼 떨어져 있어야 했다.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서로가 만나서 연락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 위원회의 권한은 대단히 제한적이어서 위원회의 업무 자체가 정보를 은폐하려는 고위 관리들에 관한 잔악 행위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이었음에도 위원회는 관리들의 잔악 행위를 조사하거나 협조하게 만들 만큼의 권한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위원회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위원회의 활동에도 콩고 주민들에 대한 학대 행위는 끊임 없이 진행되었다. 정말 이런 쪽으로는 머리가 잘 돌아갔던 모양이다. [[파일:external/thumb.kweeper.com/3bd5a12e05e7351a220fdd6f74154a2b_h.jpg]] 당시 콩고에서 찍힌 사진. [[파일:external/les.traitesnegrieres.free.fr/lesmainscoupes.jpg]] <저 위에 보이는 맨 오른쪽의 백인[* 첫 번째 사진의 인물은 로저 캐즈먼트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다.]은 [[영국]] 영사관 밑에서 일하던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 [[로저 캐즈먼트]](Roger Casement)로, 1903년에 콩고로 파견되어서 콩고에서의 잔학 행위들을 사진을 찍어서 영국에 보고하여 [[오스카 쉰들러|콩고를 레오폴드 손에서 해방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행한 인물이다.> 결국 1903년 [[영국 정부]]는 콩고에 대한 공식 조사를 위해 영국 영사관 [[로저 캐즈먼트]]를 파견하였다. 비록 사진과 문서 증거물들이 있었음에도 아무래도 정리가 잘 되지 않은 파편적인 자료들인 데다 민간인 중심의 폭로와 항의였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여론들은 회의적인 시선이 담겨 있었으며 특히 많은 정치인들과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캐즈먼트는 현지에서 끔찍한 내용의 탄원서들을 발견했다. "나무에 손을 댄 채 총 끝으로 손을 계속 두들겨 맞았다"는 젊은 청년의 탄원서도 있었고 다른 마을에서는 "3명의 어린 아이들, 한 청년과 한 노파의 오른쪽 손목이 잘려나갔다"고 쓰여 있었다. 캐즈먼트는 계속해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나는 대륙 내에 있는 2개의 큰 마을을 방문했다. 나는 마을 인구의 반이 난민이라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몇몇 그룹의 난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왜 그들의 지역에서 도망쳤는지를 묻자 그들은 계속 하소연했다. 그들은 정부 군인들에 의해 잔인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삶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우며 고향에는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다고 했다. 일정량의 고무를 갖다 바치지 않으면 군인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군인들에 의해 죽지 않더라도 아사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일을 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했다." 캐즈먼트는 콩고의 좀 더 깊숙한 곳까지 조사하려 했지만 그가 콩고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인 1903년 11월경 영국으로 돌아가 외무부에 자신의 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충분히 들을 만큼 들었고 볼 만큼 봤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크로머 백작 에버린 바링(Evelyn Baring)은 캐즈먼트와 약간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크로머 백작 역시 콩고 독립국을 1903년 방문한 적이 있었고 1905년에는 영국 조직 위원회 소속으로 다시 한 번 콩고를 방문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먼저 [[영국]]에서 [[노예]]를 해방시킨 [[윌리엄 윌버포스]]의 증손자도 모렐의 콩고 해방 운동을 지지해주었다. 물론 모렐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는 지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것은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영국의 식민지배를 싫어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모렐은 영국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를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도 열렸고, 콩고의 실태에 대한 사진전도 열렸으며 손이 잘린 콩고인들의 모습이 영국 국민들에게 그대로 드러났다. 물론 레오폴드 2세도 그냥 물러서지는 않아서 세계 각국의 언론사들에게 돈을 뿌려대서 자신을 지지하는 보도를 내보내도록 요구하며 여론을 바꿔 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콩고에서 상아 무역을 하던 [[아일랜드]] 상인이 콩고에 주둔하는 [[벨기에군]]에 의해서 처형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일랜드]]를 지배하던 [[영국]]과 처형된 [[아일랜드인]]의 사업 기반인 독일령 [[동아프리카]]를 지배하던 [[독일]]에서 들고 일어났다. 백인도 재판 없이 처형하는데 흑인들을 어떻게 대우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만 이 당시에는 아일랜드인은 제대로 백인으로 대접받지 못해서 '하얀 흑인' 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당장에 [[아일랜드 대기근]] 중 세 번째 대기근이 이 사람의 재위기에 터졌고 가장 유명한 2차 대기근은 그가 즉위할 때 끝난 지 불과 13년 전 일이었다. 다만 영국은 아일랜드를 당시에 자치령으로 간주했으며, 따라서 아일랜드인들도 자국민으로 간주되었기에 자국민을 재판도 없이 해친 레오폴드 2세에게 항의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이에 궁지에 몰린 레오폴드 2세는 여론 조작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다. 레오폴드 2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간 각국의 언론들, 특히 돈을 받은 언론들은 레오폴드 2세가 좋은 인간이라며 기사를 썼다. 하지만 [[미국]]에서 로비스트로 일하던 레오폴드 2세의 [[변호사]]가 미국 허스트의 뉴욕 아메리칸지에 레오폴드 2세가 미국에서 뇌물을 뿌려대면서 로비질을 한 것을 폭로해 버렸고 언론사들은 로비를 받은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레오폴드 2세의 말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다. 이에 [[미국]]과 [[영국]] 같은 국가들이 [[벨기에]] 정부에게 콩고를 사라고 압력을 넣기 시작했고 결국 [[벨기에 왕국]] 정부는 레오폴드 2세에게서 콩고를 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벨기에 정부는 콩고 지배를 마땅찮게 여겨서 콩고는 레오폴드 2세의 단독 지배령이었고 그 때문에 그 오만 가지 만행이 벌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